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토쿠 덴노 (문단 편집) === 사후 === 호겐의 난이 끝난 뒤 사누키인(讚岐院, 스토쿠 상황)은 죄인으로 간주되었다. 이는 천황이 이겼다고 소리 높여 선언한 선명(《헤이안유문》제2848)에도 나타난다. 사누키에서 붕어했을 때조차 상복은 커녕 조의도 표하지 않고(《햐쿠렌쇼》) 고시라카와 덴노는 맏형 스토쿠 상황의 죽음을 무시했으며, 조정 차원에서 장례를 치르지 않고 현지의 고쿠시(國司, 국사)에게 사누키인의 장례를 치르도록 맡겼을 뿐만 아니라 교토의 귀족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조문하지 않았다고 한다.(《황대기》) 사누키인을 죄인으로 보았던 교토 조정의 인식은, 사누키인과 함께 유배되었던 후지와라노 노리나가 등의 교토 귀환이 허락되고, 사누키인의 측근이었던 후지와라노 요리나가의 아들인 모로나가(師長)가 고시라카와 덴노의 측근이 된 뒤에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백성들은 측은히 생각했는지, 스토쿠 상황의 능은 '시라미네노미사사기'(白峯陵)라 불리며 가가와현(香川縣) 사카이데 시(坂出市) 기요미 정(靑海町)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현지의 백성들이 묻은 뒤 '시라미네지'라 하는 절을 옆에다 세워 그를 위로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조선시대 [[세조(조선)|세조]]에 의해 왕위를 찬탈당하고 죽은 [[단종(조선)|단종]]에 대한 인식과 비슷한 인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